MYARTS

  • 작가명 : 김정현, 영상  단채널비디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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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김정현은 연작과 을 통해 이 오래되고도 유명한 경구를 다음과 같이 재해석한다. ‘인간은 사회적 상품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밟아서는 경쟁, 사회적 예절이라는 미명 하에 갖추게 되는 위선을 과장된 극적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표현한다.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와 폭력, 그에 따른 억압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로 관찰해 온 작가의 시선이 이번 작품들에서도 여전히 날카롭다.
사회에 대한 시선의 일관성 속에서 미묘한 관점의 변화도 포착된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체 속의 부분으로서 짜인 틀 안에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군상이다. 연작과 에서는 군상이 개인으로 개별화되어 잠재적 힘을 갖기 시작한다. 개인들은 사회구조라는 거대한 틀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있다.

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진열된 다양한 상품들이 비교되고 골라지듯, 인간들도 진열되고 비교되며 선택된다. 사회 속에 진열된 인간들은 선택되길 갈망하면서 다른 이들과 경쟁한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소위 스펙을 만들고 외모를 관리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은폐된 인간의 상품화와 인간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순간에 대한 고찰이 이다.
외국인 노동자에서부터 남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계층들이 연작에 등장한다. 남학생과 같은 계층은 우리에게 인간의 상품화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상품화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기계발을 통해 사회에서 승자로 살아남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인력시장에서 건장한 신체의 남성이 팔리고 단란주점에서 젊고 아름다운 몸매의 여성이 팔린다. 이러한 현상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다양한 이름들로 정당화된 사회적 관계의 속내를 살펴본다면, 우리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상품의 구매자로 여기지만 사실 구매당하는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무대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이 정면을 향해 선다. 약간은 긴장한 모습들이다. 무엇인가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람들의 행동은 무척 자연스럽지만 그들의 배경은 일상적이지 않다. 에서 사람들은 일반 상점에서 볼 수 있는 상품의 진열 방식이 아닌,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작품 진열과 가까운 형식으로 전시된다. 즉 상황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주변 배경이 모두 제거된 검정 배경 위에 사람들이 서 있다.
이 중세시대 종교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와 같은 형식에서 온다.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과 사라진 배경 속에서 사람들은 사도와 같은 모습이다. 시각적 형식만 본다면 화면은 초월적인 숭고미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이 현실의 맥락과 연결되면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무대에 올라선 사람들은 주변의 맥락과 분리되어 있지만 관람객은 이내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파악한다. 계층에 따른 사람들의 전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사람들의 나이, 옷차림, 인종 등으로 어두운 배경 뒤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무대 위 상황에 대한 순간적인 판단이 끝나면 관람객들은 각 사람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간다. 작가 즉 카메라의 위치는 철저하게 탐욕스러운 구매자의 위치다. 관람객들은 카메라와 동일한 위치에 서게 되고 따라서 쉽게 구매자의 시선과 일치된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세한 흔들림이 일어난다. 관람객은 순간 작품 속 누군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갑자기 폭력을 행사하는 자와 폭력에 희생당하는 자 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관람객은 어떤 시선과 동일시하게 될까? 누구나 갑의 위치에 자신을 놓기를 원할 것이다. 계약이라는 그럴듯한 제도 속에서 갑은 을을 사서 마음껏 부려먹는다. 그러한 갑을 포기할 사람은 없다. 관람객은 갑의 위치에 자신을 애써 고정시키고 위안을 삼을지도 모르겠다. 은 그러한 거짓 위안을 버리라고 한다. 아무리 관람객이 갑의 위치와 동일시 하려해도 계속 을의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그렇다면 차라리 을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을의 역할을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관람객들이 수동적 을의 위치를 선택하면서 거대하고 단단한 사회 구조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내비쳐진다. 갑에게 오히려 억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약 2분 동안 앞에 놓인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관람객에게 분석이 오히려 강요되는 느낌이다. 오히려 선택되어야 하는 상품이 선택을 하라고 강요한다. 정면을 응시하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자신을 가다듬는 상품들이 강압적으로 느껴지면서 관계의 균열이 발생하고 전치가 일어난다. 이로써 갑이 최상인가라는 의 질문이 유효해진다.
에서도 개인들이 지닌 잠재적 힘이 드러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위선의 측면을 표현하는 은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형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검은 배경 속에서 양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속도로 인사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화면에 리듬감을 주는 하나의 단위다. 좌우로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사라는 사회적 약속으로 비춰지기보다 전체의 율동감과 시각적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로 보인다. 개인들이 전체 속 부분으로 전락하여 개별성이 사라지면서 기계와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외가 표면으로 드러난다.
반복 속에서 서서히 사람들의 위선에 가득 찬 표정이 떠오른다. 인사를 할 때 웃던 표정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변해버린다. 관람객은 끊임없는 반복 가운데 전체 속에서 개인들의 표정에 집중하게 된다. 반복의 형식이 전체의 구조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서히 균열을 낸다. 사라져 버린 개인이 다시 등장하고, 이들이 수동적 을의 위치를 성실히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사회의 구조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듯 보인다.

연작과 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극단적 모습으로 우리는 사회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측면 때문에 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가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베일에 싸인 실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지금이며, 은폐된 실제가 베일을 벗고 드러난 것이 바로 김정현의 작품이다.
전통적인 재현 체계 속에서는 화면이 실제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연작과 은 관람객이 카메라의 시선과 화면 속 인물의 시선 사이를 오가면서 화면에 균열을 내고 사회구조의 실제를 드러냄과 동시에 무너지게 한다. 갑과 을의 위치가 전치되는 순간이 존재하게 되면서 사회의 관찰자 조금 더 나가 고발자의 역할을 해 온 김정현의 작품이 이번에는 균열자의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이 현대 사회에 대한 뻔한 비판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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